현장정조공부 ㅡ 화성행궁
화성을 다 돈건 아니고,
화성행궁만 보았다.
행궁 앞 광장이다.
이게 행궁 정문.
경복궁으로 따지면 광화문같은거.
크라쓰있는 나무.
외문과 중문 사이의 공간.
엄마에 대한 효심이 살아숨쉬는 건물.
정조의 글씨.
행궁에서 주요 행사가 열리면 여기였다고 함.
정조 사후에 지어진 사당.
정조의 군복차림 어진.
무척 경이로운 디자인이라고 칭송받는 화령전 뒷벽.
역시 이번에도 배운건 많다.
ㅡ 정리의궤
한글로 되어있어요.
우리나라 최초 한글의궤.
이거는 정조가 혜경궁을 위해 만든 책.
화성에 대한 것들다 칼라로..
사라진줄 알았으나,
20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this) 교수님이 발견.
프랑스 사람으로 한국에 초대2대공사 꼴린드 플랑시가 가져간 책.
우리나라에서 책을 엄청 가져가서 한국서어책사(?)를 연구한 사람임.
이 사람이 죽기 전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많은 책들을 기증함.
기증하지 않고 팔아묵은 책이 딱 두권인데,
하나는 정리의궤고 나머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
두 개는 팔아묵음.
근데 산사람이 다시 프랑스 정부에 기증함.
프랑스 국립박물관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10책 중에 둘다 드감.
교수님이 반환받을라고 했으나 그건 안되어 1억내고 복사함... ㄷㄷㄷ
정조때는 의궤를 칼라로 안만듬. 그 전까지는 칼라였음.
정조가 워낙 검소했기 때문에...
다만, 엄마한테 드리는 거라 특별히 칼라로 한거임.
그래서 이거는 그냥 사진이나 마찬가지.
지금 복원된 화성행궁은 이게 발견되기 전에 한거임.
그래서 이걸 보면 차이가 제법 있음.
ㅡ 화성건축
우리나라에서 성안에 하천흐르는 성은 둘밖에 없는데, 한양도성과 여기 수원화성.
이거는 주례에 근거해서 만든거임.
정조가 이 팔달산 일대를 화성존으로 결정한게 중요함.
양경체제..를 정조가 생각했음.
정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순조가 할아버지(사도세자)를 추존하는 방식을 생각했음.
영조 오피셜 때문에...
그렇게 영조 뒤통수를 때리는 계획이었으나... 계획 실현못하고 정조가 사망.
정조는 1804년에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상왕으로서 거쳐할려고 함.
그래서 여기는 상왕의 수도.
그래서 당연히 배산임수.
반계선생이 팔달산 주목하라고 반계수록에 써놨음.
정조는 반계가 지정한 곳(지금 수원세무서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을 지정해 자리잡음.
원래 다산이 계획했을때는 정방형 4km 길이였는데, 정조가 좀 수정명령하여 5.74km 길이로 건설됨.
정조가 기공식 왔다가 축성현장을 한바퀴 걸어돌아 보고, 민가사이에 깃발 꽂혀있는걸 보고,
여기 사는 사람들이 오년전에 융릉만든다고해서 강제이주되어 온 사람들..
(그렇게 이사온 가구가 290가구라넴.)
정조는 “나라가 성을 쌓겠다고 백성들의 집을 이전시키는게 옳은 것이냐?”라고 했다함.
이미 이백년 전에 개인의 인권에 대한 생각이 있던 군주임..
그래서 그런걸 반영하다보니, 성벽라인이 정방형이 깨지고 울퉁불퉁해지고 길어짐.
원래 행궁광장 옆으로 관청건물들이 있었음.
우리나라 읍성들이 거의 문이 북쪽 빼고 3개.
화성은 북쪽대문이 관문.
또하나 중요한 것은 정조가 화성에서 풍수적용을 거의 하지 않음.
원래 배산 역할을 하는 주산은 절대 손대면 안되는데,
정조는 주산깨서 돌캐가지고 평지 성곽들을 거의 쌓음.
ㅡ 신풍루
신풍이라는 말은,,
전주 풍남문 있어요... 그거랑 같은 풍 한자.
한고조 고향이 풍패. 그 이후에 풍은 왕의 고향을 뜻함.
풍남은 남쪽에 있는 이씨 왕조의 고향.
여기는 신풍. 왕의 새로운 고향.
이 행궁이 젤 큰 행궁.
남은거 남한행궁, 과천행궁 일부, 그리고 여기, 강화행궁 일부, 고양행궁터만.
행궁은 왕이 행차 때 머무는 궁.
행차는 3 상황 ㅡ 역대 국왕능원참배, 전쟁피란, 온천 요 셋임.
현재 온양관광호텔 자리에 온양행궁이 있었음.
일반적인 행궁은 150~200칸 수준.
근데 여기는 576칸.
이렇게 큰거는 정조가 상왕으로 여기 머물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보여짐.
화성행궁 정문은 2층 누각을 만들어짐. 이건 그 당시 건축법임.
여기의 특별함은 바로 여기 나무. 풍자형 나무. 정1품2품하는...
원래 궁궐 앞에 심어지는 거.
근데 일제 때 여기 건물짓고 다 밀었는데도,, 나무는 안 비었음. 먼일이래??
복원하고 보니 나무가 이렇게 있었음.
우리나라 궁궐사에 남을 유일한 수준임.
ㅡ 행궁 like 정궁
이거는 궁궐구조하고 같아요.
조선은 정전 드가는데 반드시 3문을 지나가요. 외삼문중삼문내삼문.
일반 행궁은 외삼문내삼문 2문인데, 여기는 신풍루ㅡ좌익문ㅡ중양문 3문.
궁궐은 흔히 3조3문이라고 함.
3조는 외조(비서실) 치조(왕) 내조(왕가족)
신풍루ㅡ좌익문 사이 주변 건물들이 궐내각사같은 기능.
그래서 실제로는 이 행궁은 평시엔 수원관아인데, 왕오면 행궁전환.
여기있던 하급관리들이 왕오면 밖에 나가고 중앙관리들이 자리잡음.
여기는 철저하게 규모는 작지만 정궁의 형식으로 지어졌음.
ㅡ 봉수당
원래 장남헌(남쪽을 장대하게 하겠다..)이라고 건물이름이 있었는데,
정조가 혜경궁 잔치하며 봉수당으로 끕을 올려버림.
봉수=어머니의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
혜경궁 환갑잔치할 때, 혜경궁은 저 건물 안에 앉어있고,
정조는 밖에 나와 아래에 앉아있었다고 함.
조선역사에 이런 경우가 없음. (왕은 가장 높은 사람이니까..)
사도세자 엄마가 영빈 이씨.
사도세자 백일부터 영조가 생모로부터 격리시킴.
사도세자는 그 이후 궁 보육시설에서 궁녀들로부터 키워짐.
영빈 이씨는 후궁이니까,,, 지아들 보러가는데도 큰절드리고 가야했었고,
정조는 사도세자 사후 효장세자 아들로 양자되어 세자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혜경궁은 생모지만 숙모임.
정조가 즉위하고 왕실여자공식서열을 정하는데,
1정순왕후, 2혜경궁, 3효의왕후. 요라고.
근데 정조 죽자마자 다음날 정순왕후가 서열 바꿔븜.
1자기, 2효의왕후, 3혜경궁.
정순왕후가 혜경궁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수 있음.
당시 가장 큰 글씨를 잘 쓴다는 이조판서 조윤형이 저 봉수당 편액을 씀.
이건 현판이 하도 커서 안 띠었음.
그래서 땔깜으로 안쓰이고 이렇게 남어있을 수 있음.
ㅡ 유여택
안에 보면 단원이 그린 병풍이 있음.
정조 방이 저러게 작음. 매우 검소한 사람.
조선왕 중에 유이하게 무명옷 입고 살았던 왕.
영조도 그러긴 했는데, 헤졌다고 꼬매입지는 않았음. 정조는 꼬매입음... ㄷㄷㄷ
그러니 궁녀도 사치못하고,, 그돈을 다 민생비용으로 부어버림.
ㅡ 장락당
여기 현판은 정조친필. 물론 지금 달려있는건 복제품.
정조는 글씨를 무지 잘쓴 사람.
정조때글씨와 고종때글씨는 하늘과 땅.
정조 때 문화는 중국 최극성시(건륭제)의 문화도 비비기 힘들 정도.
정조 때 신하들은 왕이 너무 잘나서 상당히 피곤했음.
마당 앞에 2층에는 차마시는 당시의 다방임.
그런데 계단이 당시 혜경궁이 올라가기에는 상당히 개급경사.
복원이 잘못된 듯...
요안은 철저하게 궁궐에서 왕비침전형식.
ㅡ 낙남헌
여기가 옛날에 초등학교였음.
낙남헌 마당은 활쏘기도 하고,, 불꽃놀이도 하는,, 행사장소.
정조는 충무공의 학익진을 육군용으로 전환시켜 훈련했음.
유일하게 당시의 건물.
여기 간판도 조윤형 글씨.
낙남은 역시나 낙양의 남쪽.
즉, 한양의 남쪽이라는 뜻.
신풍, 낙남, 수성 이게 다 현재 수원을 의미하는 말.
ㅡ 화령전
정조 사당. 어진봉안전.
저 건물 보물임.
어진봉안한 건물이 여기랑 전주 경기전 두 곳 뿐임.
저 옆에 어재실은 순조가 와서 자고 그랬음.
이건 왜 만들어졌냐...
정조가 1791년에 사도세자를 위해 군복입은 걸로 자기 초상화를 그림.
정조 사후에 신하들이 태조의 예법을 따라 정조의 어진봉안전을 수원에 만들자고 말함.
다른 왕들의 어진은 궁궐 안 선원전이라는 곳에 둠.
태조는 함흥과 전주 두 곳에 만듬.
태조 이후 유일한 사례였음.
3개월만에 지음.
조선건물 중 가장 기품있다고 평가받음.
기둥 아래 돌다듬은 크라쓰가 작살임.
뒷 벽면에 벽돌벽 디자인이 있는데, 세계 인류사에 탑인 디자인이라고 그런다네..
저 안에 어진(상상화)이 봉안되어 있음.
조선시대 전쟁 및 한국전쟁으로 다 없어짐.
그 중에 둘 살린게 철종이랑 효명세자.
1791년 기록을 토대로 현대에 다시 그린 표준 영정.
안에는 온돌이 3개 있음.
매일 밥을 올림.
수시로 불도 때고 책도 올리고..
요 화령전 관리하는 사람이 정5품.
정조에 대해 관심이 있었는데,
자세히 좀 더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